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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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다. 허위는 그가 원하는 것이다. - 마담 드 뒤라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2판

1.

아래에서 예술이론에 새로이 도입될 개념들은 이들이 파시즘의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점에서 통상적으로 유통되는 개념들과 다르다. 그 대신 그 개념들은 예술의 정치학에서 혁명적 요구들을 표명하는 데는 쓸모가 있다.

2.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 실기 연습을 하려는 제자들에 의해, 작품을 널리 보급하려는 장인들에 의해, 마지막으로는 이윤을 탐하는 제 3자에의해 수행되었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이다. 목판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처음으로 그래픽이 기술적으로 복제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학에 불러일으켰던 엄청난 변화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세계사적인 척도에서 보면, 이러한 변화는 매우 중요한 변화이기는 하지만 세계사 전체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들 중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석판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복제기술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지 않아 그래픽은 사진술에 의해 다시 뒤처지게 된다. 사진술이 발명되면서 손은 영상의 복제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지금껏 담당해온 가장 주요한 예술적 임무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임무들을 이제는 눈이 혼자 담당하게 된 것이다. 1900년 전후에 기술적 복제는 그것이 전승된 예술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만들고 예술작품의 영향력에 심대한 변화를 끼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작업방식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점유하게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

3.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이 일회적인 현존재에서 그 작품이 존재하는 동안 처했던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 이 역사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예술작품이 물질적 구조에서 겪어 온 변화들뿐만 아니라 그것이 편입된 소유관계의 변화도 포함된다. 원작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루며, 이것이 그것 자체이자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는 정체성을 면면히 전해준다.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물론 기술적 복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러나 진품은 복제에 대해서는 위조품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완전하게 유지할 수 있지만 기술적 복제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가진다. 예건대 기술적 복제는 사진에서는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렌즈로는 포착되지만 인간의 육안에는 미치지못하는 원작의 모습들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도 있고, 또 확대나 고속촬영술과 같은 기계적 조작의 도움을 받아 자연적 시각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이미지들을 포착할 수 있다. 둘째, 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도달할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를 가져다놓을 수 있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으로 하여금 사진이나 음반의 형태로 수용자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해준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은 그 밖에도 예술작품의 존속 자체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지만, 어쨋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의 대상에서 가장 민감한 핵심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며, 어떤 자연적 대상도 그처럼 다치기 쉬운 부분을 갖지 않는다. 그 핵심 부분이란 예술작품의 진품성이다.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 사물의 전통적 무게이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아우라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영에서 떼낸다.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병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즉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대화는 전통을 엄청나게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곧 문화유산이 지니는 전통 가치들의 청산이 바로 그것이다. 아벨 강스가 1927년 “셰익스피어, 렘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 모든 전설, 신화, 종교의 창시자, 종교까지도 영화를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또 모든 영웅들이 영화의 문전에 몰려들고 있다.”고 열광적으로 외쳤을 때, 그는 광범위한 전통의 청산에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4.

비교적 큰 규모의 역사적 시공간 내부에서 인간 집단들의 전 존재 방식과 더불어 그들의 지각의 종류와 방식도 변화한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오늘날에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 속에, 아니 모사 속에, 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5.

예술작품의 유일성은 그 작품이 전통의 연관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다. 하지만 이 전통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서, 지극히 변화무쌍한 것이다. 예술작품의 아우라적 존재방식은 결코 그것의 의식적 기능에서 떨어져 나온 적이 없다는 사실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달리 말해, ”진정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의식에 근거를 둔다. 르네상스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 후 300여년 동안 줄곧 지속되었던 아름다움에 대한 세속적 추구행위는 이 시기가 지난 후에 첫 번째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그것의 근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최초로 혁명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복제 수단인 사진술이 등장하면서부터 예술은 위기가, 그러니까 이후 100년이 지난 뒤에는 명밷하게 드러나게 될 어떤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예술은 예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으로써 그 위기에 대처하였다. 이 이론에서 생겨난 것이 “순수”예술의 이념이라는 형태를 띤 일종의 부정적 신학이다. 이 부정적 신학은 예술에서 모든 사회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예술을 대상의 소재를 통해 규정하는 일을 일체 거부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의식에 기대어 살아온 기생적 삻의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복제된 예술작품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복제를 겨냥해서 제작되는 예술작품의 복제품이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진의 원판으로는 다량의 인화가 가능하다.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6.

예술사를 예술작품 속에 들어 있는 두 극의 대결로 서술하고 그 대결 과정의 역사를 예술작품의 두 극 중 한 극이 다른 한 극으로 비중이 옮아가는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 두 극이란 바로 예술작품의 제의가치와 전시가치이다. 제의가치 자체는 예술작품을 은밀한 곳에 숨겨두기를 요구한다. 예를 들면, 신상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된다. 여러 예술 활동이 제각기 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 활동의 산물들이 전시될 기회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생겨나면서 예술작품의 전시 가능성이 엄천나게 커졌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양극 사이의 양적 변화는 원시시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예술작품이 갖는 본성의 질적 변화로 변전했다. 마치 원시시대에는 절대적 역점이 제의가치에 주어짐으로써 예술작품이 주술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절대적 역점이 그 전시가치에 주어짐으로써 예술작품은 전혀 새로운 기능을 지닌 형상물이 되었다.

7.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제의가치는 최후의 보루로 물러서서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이미지의 제희적 가치는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거의 의식적인 행동에서 마지막 도피처를 찾았다. 초기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탄나는 표정에서이다. 그러나 사진에서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자 비로소 전시적 가치는 처음으로 제의적 가치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8.

그리스인들은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하는 방식을 두가지만 알고 있었다. 주조와 압형이 그것이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기술 수준 때문에 예술에서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통해 예술작품에서 그리스인들이 아마도 제일 나중에 승인했거나 가장 하찮은 점으로 치부했을 어떤 특질이 결정적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의 개선능력이다. 완성된 영화는 단 한 판으로 만들어진 창조물이 결코 아니다. 필름의 길이가 3천 미터에 달하는 “여론”을 제작하기 위해 채플린은 12만 5천 미터를 촬영하였다. 이처럼 영화는 개선 가능성이 가장 큰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개선 가능성은 영화가 영원한 가치를 극단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연관된다. 예술이 영원한 가치들을 만들어내는 데 의존했던 그리스인들에게는 개선의 능력이 가장 적은 예술, 즉 조형예술의 창조물들은 말 그대로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조형예술이 조립 가능한 예술작품의 시대에 몰락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9.

19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희화와 사진 사이에서 그 산물들의 예술적 가치를 두고 벌어졌던 논쟁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좀 빗나가고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인상이 이 논쟁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중요성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술복제시대가 예술을 제의적 토대로부터 분리시키게 되자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가상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생겨나게 된 예술의 기능상의 변화는 19세기의 시야에 포착되지 못했다. 영화의 발전을 체험하게 된 20세기에 와서도 이 변화는 오랫동안 파악되지 못했다. 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이 예술이냐는 물음에 많을 통찰력을 쓸데없이 쏟아 부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 막스 라인하르트가 -한여름밤의 꿈- 을 영화화한 데 대해 바르펠은, 지금까지 영화가 예술의 영역으로 상승하는 데 방해가 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외부세계, 이를테면 길거리, 실내, 정거장, 음식점, 자동차, 해변 등을 무미건조하게 그대로 복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영화는 영화가 지닌 참다운 의미와 진정한 가능성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참다운 의미와 가능성은 자연스러운 수단과 탁월한 설득력을 가지고 동화적인 것, 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그 특유의 능력에 있다.

10.

사진이 그림에 대해 행하는 복제는 사진이 영화 스튜디오에서 연출된 장면에 대해 행하는 복제와 종류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복제된 것은 예술작품이고,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 복제된 것은 아니다. 영화 스튜디오에서 하는 촬영 작업은 이와는 경우가 다르다. 여기서 복제된 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며, 그림을 복제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복제 과정이 예술작품인 것도 아니다. 예술작품은 영화의 경우 몽타주의 결과로 생겨난다. 이 몽타주를 이루는 개별 조각들은 어떤 과정의 복제, 그 자체가 예술작품도 아니고 사진에서 예술작품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도 않는, 어떤 과정의 복제이다. 이처럼 영화에서 복제되는 과정들은 예술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11.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연기자가 관중을 향하여 어떤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기보다 연기자가 기계장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처음으로 –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작용인데 – 비록 자신의 생생한 인격 전부를 바치면서도 그 인격의 아우라는 포기한 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우라란 사람의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우라의 모사한 있을 수가 없다. 영화 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연출하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러한 동일시가 실패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12.

13.

영화 기술과도 관련되고 스포츠의 기술과도 관련된 점으로서 주목할 사실은 누구나 그 기술들이 전시하는 성과들에 반쯤 전문가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현대의 인간은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권리가 무엇을 뜻 하는지는 오늘날 글쓰기의 역사적 상황이 어떠한가를 일별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수백 년에 걸쳐 문필 분야에는 소수의 글 쓰는 사람에 대해 수천 배에 달하는 글 읽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세기 말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각각의 분야의 기관지와 지방지를 독자에게 보급하게 된 신문의 점진적인 확장으로 인하여 점점 더 많은 수의 독자가 필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독자는 언제든지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글쓰기에서는 수백 년이 걸렸던 변화가 영화에서는 십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14.

영화의 환영적 성격은 2차적 성격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영화 제작소에서 기계장치는 현실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기계장치라는 이물질이 제거된 순수한 현실의 모습은 어떤 특수한 처리 과정의 결과, 즉 특별히 설치한 카메라장치를 통해 촬영한 결과, 그리고 그렇게 촬영된 것을 그와 동일한 종류의 다른 촬영 장면과 함께 조립한 결과로서 생겨난다. 기계장치에서 벗어난 현실의 모습은 여기서 그 현실의 가장 인위적 모습이 되었고 직접적 현실의 광경은 기술 나라의 푸름 꽃이 되었다. 현실의 영화적 재현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비할 데 없이 의미심장한 재현이 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영화적 재현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술작품에 요구할 권리가 있는, 기계장치의 개입이 없는 현실의 모습을 바로 그 기계장치와의 집중적인 상호침투를 토대로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15.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예술형식의 사회적 중요성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수용자의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점점 더 분리된다. 이러한 면은 회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관습적이 것이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된다면, 새로운 것은 혐오감을 가지고 비판된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디에서도 관중 개개인의 반응이 영화관에서만큼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곳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개별적 반응들은 밖으로 표출되면서 서로 컨트롤하게 된다.

16.

영화의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과 기계장치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영화는 그것이 지닌 재산목록들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거나, 우리에게 익숙한 소도구들에게서 숨겨진 세부 모습을 부각하면서, 또한 카메라를 훌륭하게 움직여 평범한 주위 환경을 탐구함으로써 한편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성에 대한 통찰을 증가시켜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활동 공간을 확보해주게 된다. 클로즈업된 촬영 속에서 공간은 확대되고 고속촬영 속에서 움직임 또한 연장 되었다. 우리는 확대촬영을 통해 “어차피” 불분명하게 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고속촬영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는 움직임의 모티프들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티프들 속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모티프들, 다시 말해 “빠른 움직임을 천천히 진행시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을 발견하게 된다. 카메라는 그것이 지닌 보조 수단, 즉 추락과 상승, 중단과 분리,연장과 단축, 확대와 축소 등을 통해 개입한다. 우리는 정신 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된다. 우리가 기술적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 긴장관계들을 - 이 긴장관계들은 위기의 단계에서는 정신병적 성격을 띠는데 - 대중에게 몰고 왔는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똑같은 기술화가 영화를 통해 그러한 대중적 정신이상에 대해 정신적 예방접종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영화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장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그와 같은 대중적 정신이상의 에너지가 미리 앞질러, 그리고 유익한 방식으로 분출하는 형태들 가운데 하나가 집단적 웃음이다.

17.

예로부터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아직 충족되기에는 때 이른 어떤 수요를 창출해내는 일이었다. 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살펴보면 위기의 시기가 있는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 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 무리 없이 생겨날 수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최근에도 그러한 야만적 에너지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예술운동을 볼 수 있는데, 다다이즘이 바로 그것이다. 다다이즘이 지닌 충동은 최근에 와서야 인식되었다. 다시말해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어내려고 했다. 예술작품은 다다이스트들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각적 환영이나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음향 구조물이기를 그치고 일종의 포탄이 되었다. 영화는 다다이즘이 아직도 도덕적 충격 속에 포장해서 감싸고 있던 육체적 충격을 그 포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18.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개탄하는 것은, 예술 애호가가 예술작품에 정신집중의 태도로 접근하는 데 반해 대중은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산을 찾는다는 점이다. 대중에게는 예술작품이 오락의 한 계기이고, 예술 애호가에게는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예술의 전 영역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고 또 지각구조의 변화를 가리키는 징후라고 할 수 있는, 정신분산 속의 수용은 영화에서 그 고유한 연습 수단을 갖고 있다.